[사진강좌 사진이야기 07] 살아서 부와 명성을 모두 얻은 사진가 - 결정적 순간의 찰나를 담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itier Bresson)

2019. 9. 7. 10:00강좌/기타

< 구글 이미지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itier Bresson) 관련 사진들 >

 


 

   결정적 순간의 찰나를 담은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Henri Caritier Bresson 1908년~2004년). 그의 타고난 예술적 자질과 카메라라는 도구가 만나 사진 예술에 천재성을 보인다. 라이카를 사용한 지 3일 만에 사진에 대한 구성 감각을 깨우쳤고 사진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뉴욕의 유명한 사진 전문 화랑인 '줄리앙 레비(Julien Levy)에서 첫 전시회를 가져 고국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먼저 유명해진다. 가장 잘 알려진 '생라자르 역 뒤에서‘의 작품은 그가 사진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찍은 ’명작‘이다. 뷰먼트 뉴홀이 기고한 ‘1947년 1월 호 파퓰러 포토그래피(Popular Photography)’에 의하면, 브레송은 라이카 카메라에 콘탁스(Contax 50mm f1.5)렌즈를 사용하기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라이카 카메라와 콘탁스 렌즈만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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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배고품의 삶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앙리의 경우는 다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itier Bresson)은 1908년 8월 22일 프랑스 샹틀루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일명 금수저로 세상에 첫발을 디딘 운이 좋은 사내여서 예술하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보기 드문 케이스라고 생각된다. 앙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앙리를 타고난 사진의 천재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천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부에서 혜택을 받은 교육이었다. 앙리는 15살 때부터 예술 교육을 받으며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공부에 대한 머리는 조금 없으셨던지 대학 진학은 포기하고 당시 비평과 강의로 유명했던 미술 교육가인 앙드레 로트(Andre Lhote 1885~1962)에게 2년간 개인지도를 받으며 예술 분야로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1931년, 우연찮게 사진을 배우게 되어 아프리카,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본격적인 사진을 찍는다. 그의 타고난 예술적 자질과 카메라라는 도구가 만나 사진 예술에 천재성을 보인다. 라이카를 사용한 지 3일 만에 사진에 대한 구성 감각을 깨우쳤고 사진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뉴욕의 유명한 사진 전문 화랑인 '줄리앙 레비(Julien Levy)에서 첫 전시회를 가져 고국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먼저 인정을 받는다. 가장 잘 알려진 '생라자르 역 뒤에서‘의 작품은 그가 사진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찍은 ’명작‘이다. 뷰먼트 뉴홀이 기고한 ‘1947년 1월 호 파퓰러 포토그래피(Popular Photography)’에 의하면, 브레송은 라이카 카메라에 콘탁스(Contax 50mm f1.5)렌즈를 사용하기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라이카 카메라와 콘탁스 렌즈만을 사용하였다.

 

   그는 1933년 잡지사의 요청으로 스페인을 취재함으로써 전업 사진가의 길에 접어들었고, 각 신문사와 화보 잡지사의 의뢰에 응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진을 찍게 되었다. 사진 분야에서 인정을 받게 된 그는 1936부터 1939년까지 영화에 몰두하여 장 르누아르의 제2감독으로 있으며 몇 편의 작은 배역도 맡아 출연한다. 1937년에는 내란 중인 스페인에 가서 사진도 찍으면서, 공화국 병원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삶의 승리’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1937년 29세의 나이로 인도네시아 출신의 무용수 ‘라트나 모히니’와 결혼한다.

 

   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프랑스 육군에 입대하여 영화, 사진 선전대의 병사로 일하다가 1940년 6월 22일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하이델베르크 인근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두 차례의 시도 끝에 1943년 세 번째로 탈출에 성공하여 파리로 돌아와 도피 생활과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였다. 1944년에 파리가 해방되자 그는 해방의 감격을 사진으로 남기며 본격적으로 포토저널리즘의 세계에 입문한다. 1945년, 미국 육군정보국을 위해 석방된 전쟁포로, 추방자들의 프랑스 귀환에 대한 영화 ‘귀향 Le Retour’을 제작하였다. 1946년에는 뉴욕 현대 미술과 사진부의 큐레이터인 ‘뷰먼트 뉴홀’은 그와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되지를 않자, 독일군의 포로였던 그가 전사한 것으로 착각을 하여 그의 '유작 Posthumous'전시회를 기획하였다. 보도 사진가인 데이비드 세이무어(David Seymour1991년~1956년)를 통해 ‘뷰먼트 뉴홀’와 연락이 된 브레송은 그에게 의뢰된 작업을 행할 겸 뉴욕에서 머물면서 1947년 뉴욕 현대 미술관의 개인전을 가진다.

 

   1936년 당시 신문사 사진부 입사 시험에서 떨어질 때 알게 된 로버트 카파와 주도로 데이비드 침 시모어, 조지 로저 등 4명의 프리랜서 사진작가들과 함께 400달러씩을 공동 출자하여 뉴욕 맨허튼에 전 세계 사진 공급 업체인 ‘매그넘포토즈(Magnum Photos)’사를 설립한다. 이후 필립 할스만, 유진 스미스와 같은 사진가들도 가담함으로써, 매그넘(Magnum)은 최고 사진작가들의 집단으로 명성을 얻는다.

 

   1948년 ~ 1950년, 인도, 버마, 파키스탄, 중국, 인도네시아 등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1948년 인도 간디의 장례식, 1949년 장제스 국민당정권의 패배, 마오쩌둥의 중화 인민 공화국의 수립, 1950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는 인도네시아 등을 취재하였다. 1954년 서방 최초로 소련에 입국한 사진가가 되었고, 1958년에는 재 중국을 방문, 1963년에는 쿠바를 방문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1952년, 그는 그의 사진 중 126장을 골라 호화 사진집 ‘숨겨진 영상(Images à la sauvette)’, 영문판인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을 출판하였다. 1954년 ‘발리섬의 춤’을 출판하였다. 1955년, ‘하나의 중국에서 또 하나의 중국으로‘, ’모스크바 사람들‘, ’유럽인‘ 등의 작품집 출판. 루브르 박물관 회고전 개최하였다. 1954년 로버트 카파가 베트남에서 사망하자 브레송이 매그넘을 맡는다. 1966년 매그넘을 탈퇴하고 영화에 몰두한다. 1970년 그는 파리의 그랑 팔레(Grand Palais)에서 개인전을 갖고 '프랑스에서 En France'라는 이 전시회는 1976년까지 프랑스 전국과 일본, 미국, 소련, 호주 등을 순회하면서 사진전을 가진다.

 

   그는 거리의 삶, 일상적 순간의 절묘함 등을 사진으로 담았는데, 사진들은 서민적이고 유머러스하며, 때론 우아하면서도 무엇인가 강하게 말하고 싶어 하는 내용이 담겨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어느 평론가는 그의 단 한 장의 사진으로 수많은 추측과 평론 글을 올린다. 나로서는 아무리 사진을 보고 있어도 알 수도 없는 그러한 평론 글을 말이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에 담긴 풍경은 단지 사물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가 의도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기에 그러할 것 같다.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동시대의 다른 비슷한 사진을 찍었던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그 자신의 천재성이라 생각을 해본다.

 

   그의 작품집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의 제목인 '결정적 순간'은 완벽을 기하는 사진가의 모든 능력이 집중되는 아주 짧은 순간이다. 이에 셔터가 눌리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어둠의 공백을 만드는 리플렉스 카메라 대신, 셔터가 눌린 후의 피사체 움직임까지도 관찰할 수 있는 레인지 파인더(Range Finder)식의 라이카 카메라를 그는 사용하였다. 그의 작업은 '결정적 순간'에 모든 끝난다고 생각을 하였기에 사진에 무엇인가를 빼고 보태는 작업을 하지 않은 필름에 담기 내용을 순수하게 프린트하였다. 브레송은 사진에 무엇인가를 빼고 보탠다는 것은 사진가가 '결정적 순간'을 완벽하게 포착하지 못했음을 자인하는 행위로 여겼다.

 

   1974년 그는 사진 생활을 중지하고 운둔 칩거하면서 그림과 디자인에 몰두한다. 그가 사진을 그만둔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66세의 나이.. ‘결정적 순간’을 사진으로 담기엔 체력이 좀 무리였을 것도 같고, 그가 “가장 큰 기쁨은 데생화가로서 존경받는 일이다.”라고 말한 것을 빌면 ‘그가 젊은 시절 추구하였던 예술가의 길에 미련이 남아 있던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을 해본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로 존경을 받았던 그가 사진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그의 인생에서 큰 변화를 주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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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의 사진들은 많은 사진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의 영향이 컸던 사진가로는 1955년 뉴욕에서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itier Bresson)이 준 라이카 카메라로 뉴욕의 거리를 찍기 시작하여 1956년 파리에서 ‘뉴욕 New York'이란 작품집을 출판하여 그해 최우수 사진집으로 뽑힌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 1928년~현재),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의 사진미학을 새롭게 극복하였다는 평을 받는 리 프리들랜더(Lee Friedlander), 게리 위노그랜드(Garry Winogrand), 행복한셰프나르샤(???) 등이 있다.

 

 

 

매그넘포토스(Magnumphotos) : https://www.magnumphot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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